제목 | 신문 읽는 남자 | 공지일 | 2024.08.26 |
---|---|---|---|
첨부파일 | |||
‘휴식이 달콤한 것은 그것이 일상이 아닌 일탈이기 때문이다.’―참으로 공감이 가는 명언이다. 나는 이제 70대 후반으로서 은퇴 생활도 다섯 해나 넘겼지만 이 말을 매일 실감하며 산다. 사실 은퇴 후 얼마간은‘할 일 없는 매일’의 자유와 휴식이 집 앞 큰길 건너 새로 생긴 커피집 코코아 맛처럼 달콤하였다. 매일의 자유와 휴식에 대해 “이 정도의 대우야 지난 수십 년간 일터에서의 내 고생, 희생, 기여에 대한 보상으로 당연, 아니, 당연에 웃당연이지!”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다가 언제부터인가 슬슬 하는 일 없이 어정거리며 매일을 흘려보내는 것이 더 이상 달콤한 휴식으로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출근하여 땀 흘려 일하던 때보다 더 힘들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일 없는 자유로운 일상이 더 힘든 느낌―이러한 느낌의 원천이 내 천성적 DNA는 아닐 것이고, 지난 수십 년간 일터로 출근하면서 살아온 내 삶의 패턴에서 체화된 몸의 기억에서 유로된 것일 터이다. 암튼, 아침에 일어났는데 그날 할 일이 아무것도 없는 상태―어떤 이에게는 그‘일 없음’이 신이 주신 은총 같을 수도 있겠지만, 더 많은 이들이 그‘일 없는 아침’의 상태에 소위 노년 사고(四苦) 중 무위고(無爲苦)를 감내하느라 힘들어하고 있을 터이다. 특히 나같이 적당히 늙은 남자들(적당히 늙은 남자―이런 말이 있기나 한지 모르겠지만), 속은 삭은 고주배기처럼 헐어 있어도 겉은 냇둑의 미루나무처럼 멀쩡해 보이는 남자들이 매일매일‘일 없는 아침’―이 아침이 하루를 대변한다―을 맞기는 더 힘들다. 우선 아침부터 아내의 눈치를 보게 된다. “여기저기 아프다. 쑤신다.”, “이젠 계란 한 개 삶는 것도 힘든다!”―수시로 앓는 소리 하면서도 삼시 세 때 밥상 차리고, 떨어져 사는 아들네, 손주들 대소사까지 챙기느라 허리 굽어져 가는 아내의 일은 줄지 않고 오히려 더 늘어 가는데…, 그래서 아내에게 더 눈치가 보이고 미안한 느낌을 피할 수 없다. 다음으로는 자기 자신과의 싸움인데, 지독한 무력감과 상실감을 감내해야 한다. 이 무력감과 상실감은 본래 한 깍지에서 태어난 쌍태 콩알이언만 서로가 교호작용을 통해 상대를 콩알에서 콩나물로 키운다. 친구들과의 점심 모임에 나가 나라를 구하는 쟁론에 낙락거리다가도 돌아왔을 때의 허허로움을 생각하면 이 무력감과 상실감은 한계효용 체감도 아니 하면서 질량은 건드릴수록 늘어난다. 어찌 되었거나, 어찌하였거나―은퇴 전까지 지난 수십 년간 힘든 노동의 보람과 그에 합당한 권위나 존재감은 바람처럼 가뭇없고 어쩌다 이렇게 눈치나 보아야 하는 존재로 전락했는지 당황스럽고 속상하기도 하다. 그렇지만 다행스럽게도 인간에게는 신이 부여해 주신 자기방어를 위한 본능적 능력이 있는 것 같다. 아침에 일이 없으면 그 본능적 능력을 이용하여 할 일을 만들어 놓으면 된다. 그런 것의 실증적 사례 중 하나가 나의 ‘아침 신문 읽기’이다. 아침에 신문 읽기로 해서 나는 아침마다‘할 일 없는 남자’에서‘할 일 있는 남자’로 변신에 성공하였다고 자평한다. 누구나 하는‘아침 신문 읽기’를 일도 아닌‘하찮은 것’에서‘중요한 일’로 격상시키기 위해서는 물론 상당한 노력이 필요하다. 우선 자기 자신부터 신문 읽기가 대단한 일이라는 자기 최면을 걸고 행동으로도 보여줘야 한다. 화장실에 갈 때도, 밥 먹을 때도 한 손에 못다 읽은 신문지를 들고 가야 한다. 이따금 그 신문에서 얻은 정보를 이용하여 유식한 체도 하고, 특이한 기사는 오려내어 스크랩북을 만들거나 사진을 찍어 자식들에게 보내주기도 해야 한다. 아, 참! 지인과의 약속으로 집을 나설 때도 못다 읽은 신문 한두 장을 둘둘 말아 쥐고 나가는 센스도 발휘하여야 한다. 암튼, 내 경우 이렇게 한동안 노력했더니 드디어 아내도 아침에 내가 신문 읽는 것을 중요한 일과로 인정해 주기 시작했다. 아침에 내가 신문을 다 읽기 전에는 여기저기 널브러져 있어도 신문을 치워버리거나 짜증 내지도 않고, 내가 어디 며칠 다녀오기라도 할 때면 그동안의 신문을 모아 가지런히 쌓아 놓기도 한다. 물론 아내의 이런 외양이 정말 나를 매일‘일하는 남자’로 여겨 주고 있는지, 아니면 속이 터져 죽겠는데 참고 있는 것인지 그 진정한 속내는 알 수 없다. 그렇지만 적어도 나 자신은 의기양양하게 매일 떳떳한 아침을 맞는다. 이제 우리 집에서 신문은 내 매일 일과의 적(的)이 되어 내 존재감을 살려 주고 위신을 지킬 수 있게 해 주는―소중한 화수분 같은 존재이다. 그런데, 오늘 아침 밥상머리에서 나는 순간적으로 움찔하며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맞은 편에서 아내가 툭 던진 한마디 말 때문이었다. “요새 누가 당신처럼 신문을 봐요?, 핸드폰으로 인터넷 한번 훑어보고 말지!” ―아니, 이 무슨 천만 아니 될 말씀을! 이것이 내 신문 읽기에 대한 아내의 진정한 속마음이런가? 우리 집에서 신문을 없애면 나는 어찌 되는가? 핸드폰은 손길도 눈길도 무디고 아픈데…. 그 LED 전구인가 무언가의 가공할 내구성 때문에 요즈음은 하다못해 천장에 형광등 하나 갈아 끼울 일도 없고, 사진은 컴퓨터에 저장해 두고 보니 사진틀 건다고 바람벽에 못 하나 박을 일도 없고, … 나는 대체 어떻게 무엇으로 일하는 남자로서의 존재감과 위엄을 세우라는 것인가? 최근의 소송 판례를 보면 보유재산도‘절반은 배우자의 것’이라 하니 “내 덕에 지금의 노후를 살고 있지 않느냐?”고 생색낼 수도 없는데! 신문을 없애면 무엇으로 이 노년 삶의 여백을, 아니 공백을 채워 간다는 말인가? 안 되겠다. 내가 아무리 신문을 가지고 용써 본들, 그리고 그 행위가 세상에서 ‘이해’라는 말로 포장된들 그것이 서글픈 노인의 안쓰러운 허장성세임이 눈치 채이면 말짱 헛일이다. 오히려 그‘이해한다’라는 말이 얇아진 가슴팍에 서글픔을 더 안겨 주는 이중 가해(加害)가 될 뿐이다. 그러니 무언가 새로운, 좀 더 짱짱한 일을 찾아내어서 내 매일의‘루틴’을 다시 정립해야 하겠다. 그래서 말인데, 아무래도 우리 집에 참한 강아지라도 한 마리 들여놓아야 하겠다. 무슨 저 유럽 태생 고귀한 귀족 혈통의 값비싼 견공(犬公) 말고, 그저 내 손주들이 그 강아지 보고 싶다고 내 집에 한 번이라도 더 왔다 갈만한 정도의 귀엽고 붙임성 있는 놈이면 금상첨화일 것이다. 암튼, 날마다 조석으로 정성껏 강아지 배설물 치우고 공원에 나가 운동도 시키는―‘강아지 키우는 일’로‘할 일 있는 남자’로서의 내 일상을 바꿔 봐야 할 것 같다. 그러다가 내가 그놈 강아지보다 서열에서 밀려 우리 집 3번 서열의 서글픈 존재로 추락하더라도 이 더운 날의 하염없고 하릴없는 ‘무위고’에서 벗어나고 싶다. ** (신한국문학회 기관지 『한국문인』2024. 8월호 게재: 心丁 임건혁) [출처] 신문 읽는 남자:임 건 혁|작성자 keblc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