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 고향(故鄕)과 본향(本鄕) ] 2. 내 고향 당두(堂頭) | 공지일 | 2023.08.1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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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내 고향 당두(堂頭) 내 고향은 강원도 강릉시 교동 당두이다. 당두(堂頭)란 이름에서 보듯이 우두머리 집으로 명당(明堂) 마을에 우리 집이 터 잡고 있음을 유추(類推)할 수 있다. 당두 마을은 별로 높지 않은 언덕 위에 분지(盆地)에 형성(形成)된 마을로 약 20여 호의 초가(草家)가 듬성듬성 자리하고 있는 작고 평온(平穩)한 마을이었다. 동쪽 서쪽 북쪽 삼면(三面)으로 낮은 야산(野山)이 둘러싸고 있고, 남쪽은 확 트여 일출(日出)부터 일몰(日沒)까지 해를 볼 수 있는, 곧 종일(終日) 햇볕이 잘 드는 양지(陽地)바른 언덕 위 마을이었다. 그리고 낮은 언덕을 올라야만 당두 마을로 진입(進入)할 수 있기에 행려인(行旅人)은 물론 이웃 마을 사람들과 우마(牛馬)와 자동차도 언덕 아래 길로 통행(通行)해야 자신들의 마을로 진출∙입(進出入) 할 수 있기에 당두 마을은 태생적(胎生的)으로 평온할 수밖에 없는 마을이었다 하겠다. 당두를 둘러싸고 있는 야산(野山) 너머에는 가작다리와 사문다리란 마을이 있는데, 마을 이름이 왜 가작다리와 사문다리인지는 잘 모르겠다. 아마도 위 두 마을이 낮은 야산이 사방(四方)을 두르고 있는 골짜기 사이에 형성돼 있어서 ~~다리라는 이름으로 불리지 않았나 싶다. 내 고향 당두는 그야말로 천혜(天惠)의 마을이라 생각된다. 삼면이 낮은 야산으로 둘러싸여 있어 마을을 보호(保護)하는 한편, 남쪽으로는 벌판이 2~4Km가량 멀리 그리고 넓게 자리하고 있어 시야(視野)와 마음을 탁 트이게 하고 있었으니, 답답함이나 막힘이 전혀 없어 마을 사람들의 마음 또한 여유(餘裕)롭고 개방적(開放的)이며 포용력(包容力)과 이해력(理解力)의 폭(幅)이 넓고 크다 해도 과언(過言)은 아니라 하겠다. 동남쪽으로는 십리 정도(4~5Km) 멀리 동해(東海)의 안목해수욕장이 자리하고 있고, 그 북쪽 위로 강문해수욕장과 경포해수욕장이 차례로 자리하고 있어, 여름에는 시원한 해풍(海風)이 달아오른 대지(大地)를 식혀주는 한편, 겨울에는 따스한 기운이 북풍(北風)의 한기(寒氣)를 녹여 주곤 했었다. 또한 남서북쪽 이삼십리(약 10Km) 멀리 대관령(大關嶺)을 위시(爲始)한 태백산맥(太白山脈) 줄기가 강릉시 전체(全體)를 성곽(城郭)처럼 둘러싸고 있어서 외세(外勢)로 부터의 독립감(獨立感)과 안정감(安定感)을 주고 있었다 하겠다. 그리고 정남(正南) 방향으로는 강릉역(江陵驛) 부지(敷地)가 들판으로 자리 잡고, 그 너머 벌판이 2Km가량 멀리, 또 4Km가량 넓게 논과 밭으로 이어지면서, 그 끝자락에 대관령에서 발원(發源)한 남대천(南大川)이 동해바다로 유유(悠悠)히 흐르면서 넓은 대지(大地)를 풍부(豐富)한 물로 촉촉이 땅을 기름지게 하였고, 수확기(收穫期)에 풍성한 결실(結實)로 사람의 마음을 기쁘게 살찌게 하였었다. 그리하여 내 고향 사람들은 대체로 그 심성(心性)이 유순(柔順)하고 선하고 착하다고 여겨진다. 내가 1972년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의 지역적(地域的) 환경(環境)은 위와 같았다. 한편 교통편(交通便)은 아침과 저녁으로 하루에 두 번씩 11시간씩 걸리는 영동선과 중앙선으로 운행해 서울 청량리역으로 오가는 조개탄 증기기관차(蒸氣機關車)와 10시간 정도 걸려 서울 마장동으로 오가는 시외(市外)버스가 유일한 교통수단(交通手段)이었다. 그랬던 지역 환경과 교통수단이 50여 년이 흐르는 동안 영동선(嶺東線) 고속도로가 생겨 고속버스가 2시간 30분 정도 걸려 서울을 오가고 있으며, 중앙선 영동선을 운행하던 증기기관차는 디젤기관차로 바뀌더니 이마저 운행이 중단(中斷)되고, 영동선 관광열차로 탈바꿈하였으며, 대체수단으로 고속철(高速鐵)이 놓여 1시간도 채 안 걸려 서울로 오가고 있다. 그동안 세월(歲月)과 함께 고향 강릉이 변(變)해도 너무 많이 변해 이젠 참으로 딴 세상(世上)처럼 여겨진다. 내 고향 당두 또한 예전(前)의 평온하였던 20여 채 듬성듬성 있던 초가 마을은 흔적(痕迹)도 없이 사라졌고, 마을에 아파트가 여러 동(棟) 들어서면서 마을 언덕 진입로(進入路)가 차로(車路)로 새로 넓게 뚫림으로 인해 도저히 내 고향 당두라고는 상상(想像)할 수 없을 정도로 변해 버렸다. 지역 환경은 이렇게 변하고 변하여 옛 모습조차 찾을 수 없다 해도, 내 마음속 깊은 곳엔 어렸을 때의 고향 당두의 모습이 또렷하게 살아있기에, 여전(如前)히 당시의 정경(情景)과 친구들과의 소꿉장난 놀이는 물론 밭매고 풀 뽑고, 소 풀 베고 먹이던 그리운 기억들을 떠올릴 수 있기에 이 또한 감사(感謝)한 일이 아닌가 하며 스스로 위안(慰安)해 본다. 난 고향 당두에서 일곱 살부터 고등학교 졸업할 때까지 생활했다. 깡촌(村)이었던 정선군 임계면(臨溪面)에서 양조장(釀造場) 집 장남(長男)으로 태어나, 사실은 차남(次男)인데 6.25 전쟁(戰爭) 중 장남인 형이 4살 때 무릎의 류마티스 관절염(關節炎)으로 약(藥)도 제대로 써보지 못하고 고생(苦生)하다 죽는 바람에 내가 본의(本意) 아니게 장남이 되었다고 한다. 전쟁 후 가세(家勢)도 기울고 아들은 깡촌이 아닌 좀 더 큰 도시에서 키워야 한다는 부친(父親)의 소원(所願)에 따라 일곱 살 때 양조장을 정리(整理)하고 강릉시 당두 고향으로 이사(移徙)하였다. 태어난 시골 임계에서의 어렸을 적 기억도 간혹(間或) 아련히 떠오를 때가 있지만, 여기서는 생략(省略)하고 당두에서의 기억들을 상기(想起)해 보기로 한다. 앞에서 언급(言及)했듯이 당두는 참으로 평온한 마을이기에 마을 사람들은 노인에서 아이까지 모두 심성(心性)이 곱고 선(善)하고 유순(柔順)했으며 서로 사랑하고 배려(配慮)하는 마음이 특심(特甚)했다 생각한다. 당두 마을 중앙 양지바른 약간 지대(地帶)가 높은 곳에 일본식 적산가옥(敵産家屋) 하나가 제법 너른 마당을 끼고 있어 동네 아이들의 주 놀이터가 되었고, 그곳에서 아이들은 깡통 차기와 제기차기, 구슬치기, 딱지치기, 자치기, 말타기, 연날리기, 칼싸움, 땅따먹기, 숨바꼭질 등 수많은 놀이를 즐길 수 있었으며, 마을을 삼면으로 둘러싸고 있는 야산 또한 아이들의 놀이터가 되어 뜀박질, 전쟁놀이, 눈싸움, 눈썰매, 정월 대보름 망우리 놀이, 겨울철 눈이 왔을 땐 고무신 미끄럼 타는 곳으로 아이들의 몸과 마음을 건강하고도 씩씩하게 단련(鍛鍊)하던 곳이었다. 추운 겨울날임에도 들에서 산에서 놀이하다 저녁때가 되어 집에 돌아가면 내 머리에선 김이 모락모락 떠올랐다고 하며, 눈과 얼음 위에서 양말이 다 젖도록 종일 놀다가 집에 가면 손발이 여지없이 꽁꽁 얼어 있었고, 결국 손과 발이 동상(凍傷)에 걸려 동상 걸린 손과 발을 낫게 한다고 꽁꽁 얼린 콩에 손과 발을 넣었던 기억도 새록새록 또렷하게 떠올릴 수 있다. 그리고 마을 조금 외진 곳에는 커다란 기와집 하나가 자리하고 있었으며, 나머지 집들은 우리 집을 포함해 대부분 초가였으며 그나마 단칸방의 오두막도 한 채 있었다. 유독(惟獨) 오두막 한 채와 기와집 한 채가 특별히 기억되는 것은, 마을 제일 높은 곳에 있던 오두막에는 안동 출신의 노부부(老夫婦)가 손자뻘 되는 아들 하나 데리고 살았는데, 그들은 강릉 시외버스 종점(終點) 근처 노상(路上)에서 구두 수선(修繕)하며 근근(僅僅)이 살아가면서도 그 아들에 대한 사랑이 참으로 유별(有別)났다고 기억되기 때문이다. 오두막집 단칸방은 동네 친구들이 시시때때로 거리낌 없이 함께 모여 할머니 같은 엄마가 주시는 간식(間食)을 즐겨 먹으며 놀던 곳이었고, 친구들이 들로 산으로 온종일 뜀박질 놀이하다 어둑어둑 땅거미가 지는 저녁때가 되면 각자 집으로 돌아가는데, 조금만 늦으면 여지없이 그 오두막 할머니 같은 엄마께선 덕삼아~ 덕삼아~ 하며 아들 이름을 목청껏 부르는 것이었다. 그 부르는 소리가 얼마나 크고도 높았던지 지금도 귀에 쟁쟁(琤琤)한 것은 아마도 그 엄마의 아들 안위(安危)에 대한 걱정하는 마음이 얼마나 간절(懇切)했으면 그러했을까 충분히 이해하고도 남음이 있다. 또 다른 기억은 기와집 한 채에 대한 기억으로 그 기와집은 크고 대지(垈地) 또한 넓어 동네 아이들이 함께 모여 놀이하기에 충분하였으나, 그곳에 동네 아이들이 유독(惟獨) 가지 않고 또한 그 부모와 아이들 또한 동네 어르신들이나 아이들과 어울리거나 교류(交流)하지 못했던 점이었다. 그 집은 부모님들이 시내에서 금은방(金銀房)을 하는 제법 부유(富裕)하게 사는 집으로, 가족 모두가 제칠일 안식교회 교인들로서 스스로 종교의 틀 속에 가둬 생활했고, 아이들이 일반 국민(초등)학교가 아닌 안식교회 학교에 다녔기 때문이었다. 나는 불교도(佛敎徒)였던 부모님이 그 집안과 왕래(往來)하는 것을 싫어했고 그 집 또한 그러했으나, 나는 부모님들이 그리할지도 내가 그 집에 놀러 가고 그 아들과 함께 놀이할 수 있었던 것은 동네에서 유일하게 내가 그 집 아들과 동갑(同甲)내기였고, 그 부모님들도 내가 놀러 가 그 아들과 함께 놀이하는 것을 좋아했기 때문이었다. 한편 크리스마스가 되면 그 친구를 따라 안식일교회에 가서 선물(膳物)도 받곤 했는데 그 일로 인해 우리 부모님께 특히 조모님께 크게 혼났던 기억은 지금도 생생(生生)하다. 그리고 그 집에 가면 커다란 교회 달력이 대청마루에 걸려 있었는데 달력의 그림이 하늘에서 유황(硫黃)불이 죄인(罪人)들, 믿지 않는 사람들 위로 막 떨어져 사람들이 아우성치며 고통(苦痛)스러워하는, 곧 세상을 심판(審判)하는 그림으로 당시엔 엄청 무서웠고 두려움을 느꼈으며 내 뇌리(腦裏)에 깊게 각인(刻印)되어 잊을 수 없는 경험(經驗)이었다. 그때 그 시절 곧 내가 어렸을 때 함께 웃고 울고 싸우며, 지지고 볶고 놀고 즐겼었던 그리운 옛 친구(親舊)들은 내 고향 당두 마을과 함께 그 모습을 다시 볼 수도 없거니와 만나기도 어려운 처지(處地)와 형편(形便)이 되었다. 그러함에도 내 마음속 깊은 기억 속엔 여전(如前)히 또렷이 추억(追憶)으로 잘 간직되어 있기에 난 언제든지 다시 회상(回想)하며 감상(感想)에 젖어 들 수 있음에 감사할 수도 있다. 그렇지만 이 세상에서의 내 고향(故鄕)은 친구(親舊)와 가족(家族)은, 또 그러한 기억(記憶)들은 거기가 한계(限界)임을 나는 분명(分明)히 알고 있으며 또한 깨닫고 있다. 그러하기에 나는 이러한 사실(事實)이 이러한 현실(現實)이 내가 감내(堪耐)해야 할 운명(運命)이요 숙명(宿命)임이 안타깝고 안쓰러울 따름이다. 못내 아쉬운 점으로 잊지 못하고 떨쳐버릴 수 없는 미련(未練)으로 숙제(宿題)로 영영(永永) 남아 있다. |